프롤로그 삼백 년 동안이나 잊혀졌던 진귀한 이야기
제1장 향료는 저 멀리 세상 동쪽 끝에서 온다
세상 꼭대기에 둥근 바다가 있으니
수도사,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육두구
향료섬을 찾아나선 위대한 영혼의 신사
외롭고 황량한 여행
항해일지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시인들과 극작가들
제2장 가공할 죽음의 땅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세인트헬레나섬의 귀신같은 노랫가락
지도 만드는 신학자와 이야기 수집가
그들은 왜 갑자기 피에 굶주린 살인마가 되었나
제3장 영국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 후추가 필요한가
모험을 좋아한 여왕
이게 웬 횡재인가
뿔이 솟고 얼굴이 초록색인 사람들
백 살도 더 먹은 술탄
오직 바람과 파도에 몸을 맡길 뿐
제4장 대격돌, 향료전쟁
워커는 죽어서도 웃음거리가 되었다
일찌감치 막 내린 쟁탈전
천국에서도 으뜸가는 천국
에드워드 경은 해적질을 멈추지 않았다
향료전쟁
황제의 영국인 친구
사람잡는 황제의 변덕
제5장 제독님, 배신당했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일곱 개의 눈을 가져야
소 잡아먹는 네덜란드인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 코리
동인도회사와 셰익스피어
네이라섬의 학살
제6장 역사에 길이 남은 엇나간 항해
북동항로를 찾아라
우리 목숨이 배에 달렸다네, 제군들
역사에 길이 남은 엇나간 항해
‘실로 거대한 참나무’에 경악하다
모두가 술에 취한 섬
제7장 식인종의 나라
상인인지 아니면 전쟁꾼인지
악어 천지의 강을 건너서
비밀결사조직을 좋아하는 귀족들
훌륭하고 평화로운 거래와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
탈출의 시간
이 지루하고 힘들었던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제8장 반탐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포
먼저 발 딛으면 임자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헐값에 낚아챈 맨해튼
반탐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포
재앙으로 끝난 항해
여기서는 득될 게 하나도 없다
제9장 신사들의 충돌
이 섬은 네덜란드인들 것이 아니다
선수 치지 않으면
선원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딱맞는 운동
학대행위 없이 어떻게 재산을 지키나
제10장 피의 깃발을 올리며
런섬을 지켜라
우리는 신과 세상 앞에 아무 거리낌이 없노라
이제 피를 보는 것은 불가피한 일
지옥 같은 나나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런섬을 잃었다
제11장 그러나 누가 옳은지 신은 아시리라
나으리, 제발 자비를
암보이나 학살
잔인하고 야만적인 고문에 대한 진실
나는 갓난아기만큼이나 순수하다
잔인함과 기만을 기억하기 위하여
제12장 두 나라가 나눠가지기에는 너무 적다
몰락 위기의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에 국가를 세워야 한다
맨해튼섬과 런섬을 맞바꾸다
에필로그 나른한 육두구 향기 속에 잊혀진 잔인한 피의 역사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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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航海時代)' 시절의 모험가, 상인들, 선원들의 항해 일지와 인도 및 자바의 반탐항, 동인도 제도의 여러 향료섬에서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설명문 형식의 구성을 띄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값비싼 향료를 둘러싼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책의 이야기들 중 '제8장 반탐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포'에서의 내용들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이 만고의 항해끝에 다다른 반탐에서 얼마나 힘든 역경을 겪으며 살았는 지를 보여 주는데,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내용들 이어서 실감나게 다가온다.
는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탐나는 사치품이었다. 엘리자베스 시절 이 향신료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흑사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원래부터 비싸던 이 향료의 가격은 천정 부지로 치솟았다. 이 귀한 향료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옛부터 런던의 상인들은 베니스에서 향료를 거래 했고, 베니스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향료를 구입했다. 이 육두구 열매는 아득한 동쪽 인도제국 어딘가에서 나는 것이었고 유럽의 상인들은 그곳이 어딘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육두구는 동인도 제도중에서도 반다 제도라는 작은 군도의 몇몇 섬에서만 재배 되는 열매 였던 것이다.
위대한 모험가들의 위험한 항해의 결과로 여러 항로가 개척 되었다.
상인들은 조합을 만들어 주식 회사를 세웠고, 그 주식회사에서는 향료의 원산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될 선원들과 모험가, 상인들을 모집하여 동인도 제도를 향해 선단을 파견 하게 되었다. 이 회사가 바로 그 유명한
였다.초기 향료 무역은 일찌 감치 동인도 항해에 나섰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선점하고 있었으나, 몇차례의 동인도 제도(정확하게는 반다 제도)를 향한 새항로 발견에 실패한(그들은 동인도 제도로 가는 시간을 단축 시키기 위해 북동항로, 북서 항로를 발견 하려고 북극으로 배를 몰았고, 결국 실패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후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17위원회)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처절한 향료 전쟁이 시작된다.
북동 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를 지나 남아프리카의 테이블만을 돌아 남아프리카의 동쪽에 있는 섬 마다가스 카르, 다시 북쪽으로 소카트라, 니코바르 군도, 수마트라의 아친항구, 자바의 반탐항.. 까지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반다 제도로 가는 길은 선원들과 상인들에게 비타민 부족에서 비롯된 괴혈병 - 괴혈병이 심하여 몸에서 썪는 냄새가 나고 이빨이 빠지고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였다. - 이질, 적리, 이름 모를 전염병과 거친 파도와 폭풍우 같은 선단 내부에서의 반란, 사나운 원주민들과의 대피 상황, 타국의 상선과의 바다에서의 전투.. 를 선사 하였다. 힘든 항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선원들과 상인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 했다. 하지만 향료 원산지와 유럽에서의 가격 차이는 많게는 600배까지 달했기 때문에 동인도회사는 선원들의 임금과 죽은자에 대한 피해 보상을 치르고도 발전 할 수 있었다.
책의 원제가 '나타니엘의 육두구'여서 나타니엘 코트호프의 이야기가 책 내용을 대부분 커버 할줄 알았지만 나타니엘 코트호프의 내용은 10분의 1정도만 언급되고 있었다. 나타니엘 코트호프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현지 총독이었던 데르데인의 '무슨 일이 있어도 런섬(Run Island:플로린섬)을 네덜란드로 부터 지켜야 한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충성심과 용기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불운과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남은 원주민들과 부하들을 격려 하며 3년이 넘게 네덜란드에게 끈질기게 저항 하였다. 하지만 내부 배신자로 인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백배는 더 강한 네덜란드 군대에게 대항하면서 그가 보여준 '충성','의무','용기','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슬로건이 되고 훗날 영국이 런섬을 맨하튼(뉴네덜란드 -> 뉴욕)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향료 전쟁에서 보여준 네덜란드 얀 코엔의 철두 철미함과 잔인함은 강력한 정복자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책의 부제인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용기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는 나타니엘 코트호프의 런섬에서의 대 네덜란드 저항을 말한다.
大航海時代 개요 from 엠파스 백과 사전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선두로 지중해 중심의 세계로부터 지구 전지역으로 눈을 돌려, 그 때까지 전설적·공상적 영역에 있었던 세계각지가 탐험항해(探險航海)에 의하여 속속 현실적으로 확인되어 간 시대.
본문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선두로 지중해 중심의 세계로부터 지구 전지역으로 눈을 돌려, 그 때까지 전설적·공상적 영역에 있었던 세계각지가 탐험항해(探險航海)에 의하여 속속 현실적으로 확인되어 간 시대. 지구 전역에 걸친 지리상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지리상의 발견시대>라고도 하지만, 여기에는 기존의 유럽중심적 입장에서 본 <발견>이라는 사관(유럽史觀)이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 후에 이어지는 유럽의 여러 근대국가에 의한 비(非)유럽 지역의 식민지화라는 상황을 몰고 온 배경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
이베리아반도에는 이미 711년 아랍인·무어인 등의 이슬람교도가 침입한 이후 780년간에 이르는 이슬람 지배체제를 확립하여 이슬람문화가 꽃피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그리스학이 이 지역에서 라틴어로 재역(再譯)되어 그리스도교 세계로 침투해 들어간 사실이다. 이들 중에서는 BC 5세기에 피타고라스학파가 주장한 세계구형설(世界球形說), 플라톤 등이 주장한 아틀란티스의 존재 등이 있었다. 7세기 세비야의 성(聖)이시도루스의 지구구형설(地球球形說), BC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 에라토스테네스의 투영도법(投影圖法)에 의한 최초의 세계도(世界圖), 신대륙을 예언하고 있는 BC 1세기 스트라본의 《지리학》에 있는 세계도, 폼포니우스 멜라(1세기)를 거쳐서 프톨레마이오스 클라우디오스(2세기)의 《지리학》, 또한 교부(敎父) L.C.F. 락탄티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은 부정하였으나, 콘슈의 기욤(12세기), 아르베르투스 마그누스(13세기), 아바노의 피에트로(14세기), 볼로냐대학의 체코 다스코리(1327) 등의 대척지존재설(對蹠地存在說)이 알려졌다. 그리고 야콥스 안겔리쿠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의 라틴어역(1409),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이탈리아판(版) 인쇄(1477), 또한 1410년에 피에르 다이이의 《세계의 모습》이 쓰여졌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그리스·로마·아라비아 여러 학자의 지구구형설을 개설(槪說)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적 연구와 함께 십자군과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 중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있는 동양에 관한 기술(記述)에 대한 관심, 또는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에 있다고 믿고 있던 중세의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는 전설적인 프레스터 존의 나라와 연락을 취하려는 목적, 이슬람권을 통해 들어오는 명주·오지그릇·향료·기타 동양 물산(物産)의 직접교역 및 교통로 발견 등을 목적으로 한 현실적 탐험항해가 시도되었다.
포르투갈의 탐험
포르투갈왕 주앙 1세(재위 1385∼1433)와 왕비 필리파(영국의 랭커스터公 존 오브 곤트의 딸)의 3명의 왕자(두아르테·페드로·엔리케)가 기사(騎士)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서 1415년 지브롤터의 반대쪽 해안 서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거점 세우타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아내는 것과 소금·상아(象牙)·금·노예 등을 주로 하는 이슬람무역권을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넣는 것 등을 목적으로 거국적으로 탐험항해를 추진하였다. 카나리아제도·마데이라제도·아조레스제도로의 항해, 34년 에아네스의 보아돌곶 회항(回航), 44년 세네갈강과 다음해의 베르데곶 회항, 그리고 엔리케 왕자의 사망 후 상아해안·황금해안 등의 탐험으로 82년에는 마침내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는 에루미나의 성채(현재의 가나)구축(콜럼버스도 참가)이 실행되었다. 이어서 디오고 카웅은 콩고·앙골라를 발견하였고,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육로는 87년 이후 왕명을 받고 페드로 데 쿠빌량이 아덴을 경유하여 인도반도 서해안의 향료 거래지역에 이르고, 페르시아만 연안의 호르무즈로부터 홍해까지,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 잠베지강 어귀 부근까지 남하하였다. 이어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87년 리스본을 출항, 다음해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돌아서 동해안을 약간 북상하였다가 88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그 뒤 바스코 다 가마가 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항, 베르데곶제도를 거쳐서 희망봉을 회항, 아프리카 동해안 말린디를 지나 98년 5월 20일 인도 서해안 말라바르 바닷가의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숙원(宿願)인 인도항로 발견이 실현되어, 포르투갈은 이 방면으로 대선단(大船團)을 보내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일반적으로 아메리카대륙 발견자는 콜럼버스로 되어 있으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지역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은 콜럼버스가 아니었다.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에 도달했던 노르만인의 일대(一隊)가 이미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설이 있고, 그 무렵 그들이 남겼다는 지도도 발견된 바 있다. 그 후 아조레스제도와 카나리아제도를 재발견한 포르투갈인이 대서양의 전설의 땅 안틸라·<일곱개 도시의 섬>·브라질섬 등을 찾아다니다가 그린란드 및 북아메리카에 도달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충분한 기록도 없고, 그 후 잊혀져 세계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 따라서, 근대 세계역사상에 기록될 확증을 지닌 콜럼버스의 항해가 이 시기(대항해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발견지를 동양(인도)의 일부로 생각하여, 그곳의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불렀고, 가까이에 황금의 섬 일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찾아다녔다. 콜럼버스의 서항(西航)계획을 청원(請願)받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해서 동쪽으로 우회하여 동양에 도달하는 항로의 발견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이를 부결시키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국왕 이사벨에게 청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최종단계에 들어선 레콘키스타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면의 탐험항해는 포르투갈에 뒤졌으며, 콜럼버스의 <계획>이 허가를 받게 된 것은 그라나다 멸망 직후인 1492년 4월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전후 4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 1 회는 92년 8월 3일 아침 남에스파냐의 팔로스에서 3척의 배로 출항, 카나리아제도를 거쳐 10월 12일에 바하마제도의 한 섬을 발견하고 이것을 산살바도르라고 명명하였으며, 다시 쿠바·아이티·소(小)앤틸리스제도 등을 확인하고, 이듬해 3월 팔로스항으로 귀항하였다. 이미 1481년 교황 식스투스 4세의 교서(敎書)로 기니를 비롯한 아프리카 서해안의 발견지가 포르투갈의 영유(領有)로 인정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앞서 1479년 아르카소바스조약으로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인의 발견지와 그 영유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냐는 콜럼버스의 진언에 따라서 즉시 그 발견지의 영유를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출원하였다. 교황은 1493년에 4개의 교서를 내려 에스파냐의 영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아조레스제도 및 카보베르데제도 서쪽 약 483㎞의 해상의 경선(經線)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 해역에 속하는 육지를 에스파냐령, 동쪽을 포르투갈령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양제도의 경도 차이와 측량의 부정확 때문에 이 경계는 양국의 직접교섭에 맡겼다. 결국 94년 6월 7일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하여 교황이 결정한 선을 다시 약 1304㎞ 서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약 1786㎞ 해상의 남북 경선을 경계선으로 하였다. 그 때문에 남아메리카의 동쪽으로 돌출한 부분(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영유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제 1 차 항해에서 귀국하자, 인도 발견이라는 잘못된 보도가 전유럽으로 전파되고, 즉각적으로 제 2 차 항해가 계획되어 93년 9월 카디스를 출항하였다. 1차 때보다 남쪽으로 진로를 잡아 소앤틸리스제도·아이티 등을 탐험하고 9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로 제 3 차(1498∼1500)·제 4 차(1502∼1504) 항해를 거듭하였으나, 더 서항할 항로가 발견되지 않아 콜럼버스의 입장은 점점 곤란해져 갔다. 98년 콜럼버스가 제 3 차 항해를 시작할 즈음에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고 있었다. 또 포르투갈왕 마누엘이 브라질 발견자인 P.A. 카브랄의 보고를 받고서 파견한 수석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501년 5월 리스본을 출발, 카브랄이 지난해 5월에 도착한 남아메리카의 동해안 산타크루스를 거쳐 리우데라플라타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대서양상의 남위 46˚ 부근까지 남하하였으나 남극권(南極圈)의 심한 비바람에 저지당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시에라리온으로 되돌아갔다가 1502년 9월 리스본으로 귀항하였다. 그는 이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도달한 대서양의 서쪽 일대가 인도가 아니라,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은 <제 4 의 대륙>임이 거의 틀림없다고 믿었다. 1503년 4월 그가 리스본에서 L.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고장이 <신대륙(Mundus Novus)>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므로, 콜럼버스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507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라틴명 <아메리쿠스>라고 명명되었다.
세계주항(世界舟航)
1513년 V.N. 발보아가 태평양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508∼1509년까지 포르투갈의 말라카원정(遠征)에 참가하여 활동한 뒤 귀국한 마젤란은 그 후 F. 세라운이 몰루카제도의 모양을 알린 편지와 친구인 우주지학자(宇宙誌學者) L. 펠레이로의 의견 등에서, 가마가 발견한 종래의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포르투갈의 인도항로에 의존하지 않고서 남아메리카를 서쪽으로 회항하여 몰루카제도에 도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에게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세비야로 가서 에스파냐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가를 받았다. 그는 총지휘관에 임명되었고, 5척의 선박에 265명을 태우고 19년 9월 20일 산루카르에서 출항하였다. 남아메리카의 남단에서 마젤란해협을 발견하고, 이것을 빠져나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데 성공, 4개월의 고난 끝에 겨우 산라사로(필리핀)군도에 다다랐다. 그 자신은 세부섬 동쪽의 막탄섬에서 원주민들과 전투하다가 21년 4월에 전사하였으나, 18명의 승무원은 다음해인 22년 9월 산루카르로 무사히 귀항함으로써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하였다.
기타의 탐험항해
콜럼버스가 제 1 차 항해에서 인도의 일부에 도달하였다는 보도가 유럽에 전해지자, 영국 국왕 헨리 7세의 원조하에 제노바 출생인 조반니 카보토는 1497년 5월 브리스틀을 출항하였다. 그는 북항(北航)하다가 서항하여 케이프브레턴(또는 래브라도르)섬을 발견, 다시 뉴펀들랜드를 탐험하고, 같은 해 8월 브리스틀로 귀항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에 의해 아프리카 남단을 동쪽으로 회항하여 동양에 이르는 항로, 에스파냐에 의해 남아메리카 남단을 서쪽으로 회항하여 몰루카제도에 이르는 항로의 탐색에 이어서, 대항해시대에 한발 늦은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북서항로 또는 북동항로를 이용하여 동양에 이르려는 시도를 하였다. 아버지 조반니 카보토의 항해에 동행한 그 아들 세바스티아노는 1503년에 단독으로 북방항로에 대한 탐험차 출항하였다. 그 밖에 영국에서는 R. 찬설러 지휘하의 H. 월러비의 항해, C. 재크만·M. 프로비셔 등의 항해가 있었다. 프랑스도 J. 카르티가 세인트로렌스강을 발견, 후일 프랑스의 캐나다 식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방면으로의 항해는 모두 동양으로의 항로를 발견하지는 못하였으나 북아메리카의 북동해안·그린란드·뉴펀들랜드·허드슨만 일대가 유럽인에게 확실하게 알려졌다.
대항해시대의 세계사적 의의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에스파냐인의 신대륙 내부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오히려 서항하는 항로 발견에 노력이 기울어졌다. 발보아는 파나마지협을 횡단함으로써 태평양 기슭에 도달하였으나, 계속 남진할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F.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발견하여 제국을 정복하였고, 그 이전에 H. 코르테스는 멕시코 중앙부의 아스테카왕국을 정복하여, 에스파냐는 이 방면에서 식민지 수탈정책(收奪政策)을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 식민지 체제의 확립은 세계역사상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가져왔다. 나아가 아프리카 남단을 회항하여 동양에 도달한 포르투갈이 구축한 세계무역체제와, 신대륙으로부터 또다시 태평양을 서항하여 필리핀에 도달한 에스파냐 식민지체제와의 충돌은 몰루카제도 근처에서 격화했다. 이베리아의 2개 국가에 의한 세계지배체제의 확립은, 이어서 영국·네덜란드·프랑스·기타 유럽 여러 나라가 절대왕정의 형성을 배경으로 세계의 부(富)의 수탈과 권력의 확장을 추구함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침략해가는 발단(發端)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이탈리아 상인이라든지 이슬람 상인에 의한 지중해무역체제가 붕괴되고, 신대륙으로부터 유럽에 보내지는 귀금속과의 교환에 의한 유럽 공업품의 수출, 또는 향료를 비롯한 동양 산물의 직접 도입,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사탕수수재배가 시작되어 유럽에 근대자본주의의 형성을 실현시키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비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화(化)가 추진되었다.
대항해 시대 연표
AD 1394 항해왕자 엔리케 출생(~1460)
1409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라틴어로 번역
1415 엔리케의 포르투갈군, 북서아프리카의 세우타 공략
1434 질 에아네시, 보자도르곶을 회항
1451 C. 콜럼버스, 제노바에서 출생(~1506)
1477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이탈리아에서 인쇄
1482 D. 카웅, 콩고와 앙골라 탐험(~85)
1487 바르톨로뮤 디아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회항에 성공(~88)
1492 콜럼버스, 아메리카수역에 도착. 바하마군도·쿠바를 발견
1493 콜럼버스, 제 2 회 항해(~96). 소앤틸리스제도·아이티를 탐험
1494 토르데시야스조약 체결. 에스파냐·포르투갈이 양국의 영유권을 분할
1497 V. 가마, 아프리카를 남하, 이듬해 5월 20일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 G. 카보토, 북아메리카 연안(뉴펀들랜드)을 탐험
1498 콜럼버스, 제 3 회 항해(~1500). 남아메리카 연안을 탐험
1502 콜럼버스, 제 4 회 항해(~l504). 중앙아메리카 연안을 탐험
1507 신대륙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이름붙임
1511 포르투갈, 말라카 점령
1513 V.N. 발보아, 파나마지협을 횡단하여 태평양에 도착
1519 H. 코르테스, 아스텍왕국을 정복(~21). 마젤란, 카를로스 1세의 명에 의하여 세계일주 항해 출발.
1520 마젤란, 남아메리카 남단에서 마젤란해협 발견
1531 F. 피사로, 잉카제국 정복(~33)
1535 J. 카르티에,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
1545 페루의 포토시 은광산 발견
1553 H. 윌러비·R. 찬설러, 최초의 북동항해 시도
1576 M. 프로비셔, 북서항로 개척을 위하여 캐나다로 항해
160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제 1 회 항해
1610 H. 허드슨, 북서항해 출발. 허드슨만에서 제임스만에 접어들어 이듬해 죽음.
음냐~ 다시 보고 싶다 ^^;;